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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으로의 당구 나들이  

생각해 보면 나의 당구수업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은 것 같다. 일부러 당구만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해외여행은 결과적으로 외국 당구장을 순방한 격이 됐고 외국무대를 돌아본 이 체험이 기량 향상의 알파 요소였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외국행은 혜화전문 2학년 때의 겨울방학을 이용한 동경 구경이었다. 지금은 머나먼 현해탄이지만 그 시절의 일본땅은 비교적 내왕이 자유로웠다. 보다 넓은 세계로 시야를 열어 주기 위한 가친의 배려가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게 만들었으나 1주일여의 동경 체재는 한마디로 ‘당구계 시찰’이었다. 이 당시 동경에는 약 2천여개의 당구구락부들이 그야말로 문전성시의 붐을 맞고 있었는데 그 중 20여개 이상을 순방했으니 나의 당구 광기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일본 당구장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우선 깨끗함에 질렸으며 이런 청결함은 당연히 사교장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인 실력은 그다지 월등하지 않아 대개가 아마추어들로 그냥 즐기는 정도였다. 간혹 고점자들을 만나 대결도 해봤지만 나 같은 3백점대 실력자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실전에서 느낀 점은 우리 당구가 순전히 연습에 의한 경험 당구인데 반해 일본은 계산법에 의한 정석 당구로 특히 기본기가 충실한듯 싶었다.

이 학생시절에 겪은 일본당구계 견학은 두 가지의 멋진 성과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앞회에서 말한 일본의 당구명가 가쓰라(桂) 일가와의 상봉이고 다른 하나는 쿠션 계산 책자의 입수다. 유명한 가쓰라구락부는 당시 긴자(銀座3町目)에 위치했고 자매 중 동생인 노리꼬(典子)씨와 해후, 오래도록 친분이 이어졌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갓 30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섬세한 손길이 상아공을 겨냥할 때의 그 모습은 젊은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3쿠션 책자란 당시로서는 우리 당구인들에겐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다. 당구에 관한 책자가 많이 나온 지금에도 이 책만은 역시 뛰어난 지침서였다. 하물며 그 시절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내용은 각 공의 위치에 따라 쿠션 포인트를 이용한 3쿠션치기의 꺾임 계산법인데, 한마디로 포인트 보는 법을 공식화시킨 해설집이었다. 당시 일본내 3쿠션 당구법의 최고봉 마쓰야마 긴레이(松山銀嶺)가 직접 쓴 이 역작은 현재까지도 당구기술서 중의 교본으로 3쿠션 수업자들에겐 가히 필독의 원전이다.

내가 이런 쿠션 계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3백점대에 올라 그간의 보통 크기 중대에 점점 싫증을 느끼고 충무로 쪽 일본인촌 구락부에 출입하고부터였다. 내가 그쪽의 대대에 익숙치 못해 쩔쩔매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정확한 각도로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연유를 알고 본즉 바로 이 전문서적을 통한 각도계산이었다. 온 장안을 헤매다시피 뒤졌으나 입수하질 못했고 동경에 닿자마자 최우선 선결과제로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바둑도 그렇듯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연후에는 반드시 이론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다음 단계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있다.

이 일본행이 있고부터 틈나는 대로 국내 각지의 당구장도 여행삼아 찾아봤는데 남쪽보다는 이북이 저변인구나 기술면에서 보다 우위였었던 것 같다. 특히 평양, 북청, 함흥, 청진 등지가 각기 한바닥을 이루고 있었으며 3백점대 이상의 고점자도 많았다.

이 중 평양은 마치 안방을 드나들듯이 하루길로 나들이한 적도 많았으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창경원 벚꽃이 만발할 때쯤이면 모란봉 벚꽃도 꽃순을 열어 대략 1주일쯤 늦었다. 이 때부터 꽃길 따라 당구원정을 가면 현지의 서문통당구장이 주전무대였다. 실력을 떠나서 평양 젊은 패들의 호기(豪氣)로 봄밤이 온통 술에 젖곤 했었다.

두 번째의 외유인 북경행은 동경 때와는 달리 순전히 진학 목적의 여로였다. 이때가 내 나이 20살 되던 1943년 여름. 그 이전 혜화전문 3년을 졸업하자 선친은 일본 유학 대신 중국을 권했고 이에 따라 북경대학 문학부를 지망해 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행차였다.

서울을 하오 6시 반에 떠난 만주행 특급 희망호가 봉천(奉天)에 닿기는 이튿날 하오 4시 반. 기차가 멎자마자 그 길로 청엽구락부(당구장)에 직행한 것은 이곳에 선배당구인 박수복(朴守福)씨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경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겨뤄 보고픈 젊은 패기가 작용한 중도하차였다. 아무튼 낯선 이역에서 평소 친숙했던 박선배를 만난 반가움이란 대단했고 3일간을 머물며 당구장과 술집 명소들을 찾아 쏘다녔다. 봉천 시내에는 약 50여개의 당구장이 있었으며 대다수가 일본인들의 경영이어서 시설이나 격조 모두 손색이 없었다.

그곳 당구고객의 국적 비율은 1할 정도가 중국인, 2할이 한국인이고 태반이 일본인들이었다. 게임을 관전하며 재미있게 느낀 것은 당구대 위의 제각기 다른 국민성이었다. 일본인은 쉬운 공부터 치되 섬세한 반면 스케일이 적어 모험성이 없었고, 한국인은 실속보다 과시 위주면서 사내답게 투기적인 당법이고, 중국인은 물론 실력도 뒤졌지만 지더라도 대국적으로 게임보다 분위기를 즐기는듯 싶었다.


<사진4>1970년대의 당구인들, 앞줄 왼쪽부터 강두석, 이의선, 조동성, 최기창, 서정찬, 전화영씨. 뒷줄 왼쪽부터 홍순면, 이상천, 정정우, 김명석, 박병문, 김동수, 김용석씨


                   
10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대용품 시대  조동성
9   2차대전 나자 전시체제 돌입으로 당구도 사양길  조동성
8   일본과 중국으로의 당구 나들이  조동성
7   혜화전문 시절의 당구수업  조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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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장안의 회제  조동성
4   1930년대엔 당구장은 전국으로 확산돼  조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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